Truth & Grace필라한인침례교회
목회 칼럼 · Column
A word for the week

목회 칼럼

짧고 깊은 묵상으로, 파편화된 삶을 하나님의 진리로 잇습니다. 읽고 싶은 글을 눌러보세요.

말씀 묵상

검색창이 줄 수 없는 것

정보는 손끝에 넘치는데 지혜는 왜 모자랄까요? 지혜의 근본은 주님입니다.

세계관

생각보다 깊은 곳

생각하기 전에 이미 사랑하고 있는 우리, 그 사랑을 먼저 새롭게 하신 주님.

세계관

생각도 주님께 드립니다

광고가 생각을 잠재우는 시대, 주님은 우리 생각까지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공동체

우리가 다시 모이는 이유

외로운 시대, 교회는 십자가로 하나 된 가족이 얼굴을 맞대는 자리입니다.

말씀 묵상

잊지 않으시는 분을 기억합니다

추억이 아니라 언약입니다. 우리가 잊을 때에도 그분은 기억하십니다.

세계관

이름 짓는 손, 이름 주신 분

이름은 실재를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실재를 정하십니다.

말씀 묵상

손에 쥔 성경의 값

오백 년 전 한 사람이 목숨으로 옮겨 놓은 말씀, 오늘 우리 손에.

세계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확신은 근거가 아닙니다. 되받기 전에 한 번 물어보는 대화.

세계관

당연해진 사랑의 뿌리

위선자라는 말 앞에서, 세상이 당연히 여기는 그 선함의 뿌리를 묻습니다.

말씀 묵상

놓아야 할 것은 붙들고, 붙들어야 할 것은 놓습니다

내 손의 문제는 힘이 아니라 방향이었습니다.

가정

내 아이의 첫 연애 상대가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은, 관계의 수고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성

AI는 3초 만에 답하는데, 하나님은 왜 잠잠하실까

즉답의 시대에 잃어버린 것은 정보가 아니라 인내입니다.

목회

잊지 않겠다는 약속

감옥에서 들은 냉소 한마디가 50년의 사역이 되기까지.

목회

성도의 발걸음을 가볍게

세상의 마찰 속에서 교회가 보여주는 사랑의 구체적 행동.

리더십

당신의 유산은 누구인가

야망 대신 사람을 택한 목사의 선택, 영혼의 유산.

공동체

친절은 시작일 뿐이다

따뜻한 환대를 넘어, 함께 성장하는 소속의 공동체로.

말씀 묵상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정말 자유일까요?

진리 안에 머물 때 누리는, 참된 자유의 역설.

교회 사역

보이지 않는 손길, 예배 경험 센터 이야기

예배는 누군가의 기도와 땀 속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세계관

안개 낀 세상, 우리 집은 '진리의 등대'입니까?

안개를 없애기보다, 변하지 않는 빛을 비추는 가정.

세계관

흔들리는 세상 속, 변하지 않는 진리의 닻을 내리며

탈진실 시대, 감정을 넘어선 진리의 기준 위에.

가정

거실로 찾아온 전쟁, 가정을 기도로 파수하십시오

미디어의 파도 앞에서 가정을 영적 요새로 세우기.

소그룹

정직한 고백이 공동체를 살립니다

불편함 없는 모임을 넘어, 고백이 흐르는 은혜의 자리로.

교단 소식

2026년 올랜도 총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SBC·한인총회의 핵심 결의와 진리 수호의 다짐.

말씀 묵상

하나님 앞에서 변명이라는 짐을 내려놓으며

사울의 세 가지 변명을 거울삼아 정직한 순종으로.

소그룹

삶의 나눔을 넘어, 말씀이 이끄는 소그룹으로

친교를 넘어 말씀 앞에 함께 서는 공동체로.

소그룹

인도자는 곁에서 함께 걷는 동행자

앞에서 끌지 않고, 엠마오 길처럼 느린 걸음에 맞추어.

세계관

파편화된 세상, 통전적 진리로 잇다

삶을 조각내지 말고, 모든 영역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말씀 묵상

검색창이 줄 수 없는 것

요즘은 궁금한 것이 생기면 몇 초 만에 답을 얻습니다. 병의 증상도, 집값도, 어제 경기 결과도 손바닥 안에서 다 찾아집니다. 인공지능에게 묻는 질문만 해도 하루에 수십억 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는 것은 이렇게 많아졌는데, 우리 삶은 그만큼 지혜로워졌습니까? 다툼과 분노와 빚과 외로움은 여전합니다. 한 시인은 거의 백 년 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식 속에서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 있느냐고.

성경은 정보와 지혜를 구별합니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 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 9장 10절). 경외는 겁에 질린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없이 쌓은 지식은 우리를 더 똑똑하게 할 수는 있어도 더 선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를 내 옳음의 근거로 삼는 일도 때로 지혜인 척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지혜를 한 분 안에서 보여 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로새서 2장 3절). 어리석게 걸어온 길, 알면서도 거스른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애써서 따내는 상이 아니라, 그분께 나아가는 이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번 한 주, 화면을 켜기 전에 먼저 말씀 한 절을 펴 보십시오. 검색하기 전에 먼저 기도로 여쭈어 보십시오. “주님, 오늘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요?” 지혜는 하루아침에 얻는 것이 아니라 평생 걸어가는 길입니다. 답을 빨리 얻는 사람보다 바르게 사는 사람이 되도록, 지혜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 칼럼은 콜슨 센터 BreakPoint의 “Pursuing Wisdom Amidst the Counterfeits”(2026. 10. 13)가 던진 질문을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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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생각보다 깊은 곳

사람은 눈에 보이는 생각만으로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같은 빈 무덤 앞에서도 어떤 이는 무릎을 꿇고, 어떤 이는 고개를 젓습니다. 증거가 달라서가 아닙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가’라는 보이지 않는 전제가 이미 결론을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한 논평가의 말처럼 우리는 세상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어떤 세상이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밑그림을 맨 첫 줄에서 바로잡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 종살이에 길든 백성에게 하나님은 율법보다 먼저, 세상과 사람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 깊습니다. 우리는 정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억누르는 죄인이어서 바로 보지 못합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무엇을 믿고 싶은지를 이끕니다. 교리는 바르게 외우면서도 돈과 체면과 편안함을 더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 대신 온전히 지키셨고, 어긋난 사랑과 흐려진 눈의 죄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닫힌 눈을 여십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일서 4장 19절). 빈 무덤은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보증이며, 그 은혜가 우리의 눈과 사랑을 처음부터 다시 빚으십니다. 새로운 눈은 노력의 상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이 은혜 안에서 이번 한 주, 하루에 한 번만 조용히 물어보십시오. 작은 질문 하나가 하루의 방향을 바꿉니다. 오늘 내 시간과 걱정은 무엇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 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고, 말씀과 예배와 지체들의 얼굴 앞에서 사랑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하십시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칼럼은 콜슨 센터 BreakPoint의 “How Christians Christianized the Idea of Worldview”(2026. 10. 2)가 던진 질문을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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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생각도 주님께 드립니다

하루에 우리는 만 육천 개가 넘는 광고에 노출된다고 합니다. 광고는 대개 생각을 돕기보다 생각을 건너뜁니다. 그럴듯한 이미지로 없던 필요를 만들어 놓고, 그 필요를 채워 준다며 물건을 팝니다. 한 논평가는 이런 문화를 ‘사람의 지성을 잠시 잠재워 지갑을 여는 기술’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어느새 생각할 힘마저 빼앗기는 시대입니다. 편리한 화면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묻기에 앞서, 사람이 얼마나 쉽게 눈과 마음을 빼앗기는지부터 말합니다. 죄는 우리의 욕심뿐 아니라 생각까지 흐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합격할 수 없습니다. 생각마저 주님 앞에 빚진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그 계명을 온전히 지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흐린 생각과 죄값까지 담당하셨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속임수로 사람을 끌지 않으셨습니다. 빈 무덤을 열어 보이시고 오백여 형제에게 나타나셔서, 눈으로 보고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눈을 감고 뛰어드는 도약이 아니라, 진리 앞으로 이끄시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교묘히 지어낸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오직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라”(베드로후서 1장 16절).

이 은혜를 입은 사람은 생각도 주님께 드립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로마서 12장 2절). 이번 한 주, 무심코 넘기던 화면 시간 가운데 삼십 분만 떼어 좋은 책 한 권과 말씀 앞에 앉아 보십시오. 들리는 말을 그대로 삼키지 말고 분별하며, 생각까지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로 드리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까지 기뻐하십니다.

이 칼럼은 콜슨 센터 BreakPoint의 “Thinking Like Jesus in a Consumer Culture”(2026. 9. 30)가 던진 질문을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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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우리가 다시 모이는 이유

요즘 동네 카페와 책방, 오래된 극장들이 하나둘 문을 닫습니다. 사람들은 집과 일터만 오가며 온라인 주문과 영상 시청으로 하루를 채웁니다. 얼굴을 마주할 곳이 그만큼 줄어든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만성적인 외로움이 하루 담배 열다섯 개비를 피우는 것과 비슷한 해를 끼치며, 조기 사망 위험도 함께 높인다고 경고합니다. 편리해질수록 오히려 더 외로워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외로움은 사회 구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진 더 깊은 원인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나와 이웃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담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모임이 아무리 많아져도 스스로 그 담을 허물지 못합니다.

바로 그 담을 허물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에베소서 2장 14절). 십자가에서 그분은 우리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한 몸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커피와 프로그램으로 사람을 붙드는 모임이 아닙니다. 십자가 값으로 산 한 가족이 실제로 얼굴을 맞대는 자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히브리서 10장 25절)라고 당부합니다. 의지력을 짜내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한 가족 된 우리에게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부탁입니다.

이번 주, 오래 자리를 비운 한 지체에게 먼저 연락해 보십시오. 예배 후 잠깐이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눠 보십시오. 그 작은 걸음이 외로운 시대를 향해 교회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강한 응답입니다.

이 칼럼은 콜슨 센터 BreakPoint의 “The Church as Hope for Humanity”(2026. 9. 22)가 던진 질문을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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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잊지 않으시는 분을 기억합니다

요즘 옛 광고와 옛 노래를 모아 올리는 계정들이 인기입니다. 지나간 장면 하나에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이 그리움은 단순한 취향이 아닙니다. 기억하도록 지어진 사람의 흔적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억하느냐보다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우리를 바꿉니다.

우리의 기억은 자주 기울어집니다. 좋았던 것만 골라 담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기도 하고, 반대로 지나간 것은 다 낡았다고 밀어내기도 합니다. 어떤 시대는 달력까지 새로 만들어 과거를 끊어내려 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끝은 같습니다. 기울어진 기억은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 가둡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억은 추억이 아닙니다. 순서가 다릅니다. 우리가 기억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기억하셨습니다. 그분은 맺으신 언약을 한 번도 잊지 않으셨고, 잊고 돌아선 백성을 끝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떡을 떼시며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그 상 앞에서 우리가 붙드는 것은 우리의 결심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분의 몸과 피입니다. 기억은 우리가 쌓은 공로가 아니라, 먼저 받은 은혜를 되짚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억은 마음속 일로 그치지 않습니다. 기억한 사람은 감사하고, 돌이키고, 걸어갑니다. 히브리서는 말씀대로 살다 간 이들을 기억하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편 103:2).

이번 한 주,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 한 가지를 적어 두십시오. 그리고 그 기억을 식탁에서 가족에게, 또 곁에 있는 성도에게 말해 주십시오. 기억은 혼자 쥐고 있으면 흐려지고, 나눌 때 오래 남습니다. 우리가 잊을 때에도 잊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 기억의 주인이십니다.

이 칼럼은 콜슨 센터 BreakPoint의 “The Gift of Remembering”(2026. 9. 16)이 던진 질문을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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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이름 짓는 손, 이름 주신 분

요즘 이름이 자주 바뀝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호수와 산과 기지의 이름을 새로 붙였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이름 바꾸기는 어느 한쪽만의 일이 아닙니다. 거리와 기념일과 운동팀의 이름도 계속 바뀝니다. 이름은 붙였다 떼는 꼬리표가 아니라, 그것을 무엇으로 볼지를 정하는 틀입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우리의 말이 실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만들어 낸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태아를 다른 말로 부르면 다른 것이 되고, 어머니를 다른 말로 부르면 다른 존재가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만 맞습니다. 우리 말에 힘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 힘은 우리가 실재의 주인이어서가 아니라,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분의 형상을 우리가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짐승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 이름만은 스스로 짓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려동물의 이름을 짓지만, 반려동물은 우리 이름을 짓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름은 우리보다 크신 분이 부르십니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세상이 무엇을 뭐라 부르느냐보다, 내가 나를 무엇이라 부르느냐일 때가 많습니다. 실패자, 버려진 사람, 이미 늦은 사람. 그 이름들은 힘이 셉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지워지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죄인이라 불려 마땅한 우리를 위해 그분이 대신 정죄를 받으셨고, 그 값으로 우리에게 새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이번 한 주, 내가 나에게 붙여 온 이름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곁에 있는 이를 부르는 말 한마디를 조금 더 조심스럽게 골라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뭐라 부르든, 마지막에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칼럼은 콜슨 센터 BreakPoint의 “The Power of Naming”(2026. 9. 9)이 던진 질문을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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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손에 쥔 성경의 값

올해는 윌리엄 틴데일이 신약성경을 영어로 옮긴 지 오백 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시 영국에서 허락 없이 성경을 자기 나라 말로 옮기는 일은 이단으로 몰릴 만한 범죄였습니다. 틴데일은 고국을 떠나 독일로 피신해 번역했고, 인쇄한 성경을 몰래 배에 실어 영국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런던의 한 주교는 시중의 책을 모조리 사들여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1536년 가을, 틴데일은 마흔둘의 나이에 형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번역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쓰는 여러 신앙의 단어가 그의 손끝에서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속죄’입니다. 그는 이 말을 ‘하나님과 하나 됨’이라는 뜻이 담기도록 지어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일, 그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고백이 한 단어 안에 담긴 것입니다. ‘유월절’, ‘속죄소’, ‘희생양’ 같은 말도 그가 만든 것입니다. 신앙을 담을 그릇이 없던 언어에 그가 그릇을 빚어 넣은 셈입니다.

오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집에는 성경이 여러 권 있습니다. 서재에도 있고, 차 안에도 있고, 주머니 속 전화기에도 있습니다. 귀한 것이 흔해지면 값을 잊습니다. 값을 잊으면 손이 가지 않습니다.

성경이 귀했던 시절에는 목숨을 걸고 그것을 읽었습니다. 성경이 흔해진 시절에는 손만 뻗으면 닿는 자리에 두고도 펴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 등불은 켜야 빛이 됩니다. 펴지 않은 성경은 켜지 않은 등불입니다. 말씀은 지켜야 할 규칙집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번 한 주, 하루에 한 장이라도 좋으니 성경을 펴십시오. 틴데일의 피는 그 책을 우리 손에 놓았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놓았습니다.

이 칼럼은 콜슨 센터 BreakPoint의 “500 Years of the Tyndale Bible”(2026. 9. 1)이 던진 질문을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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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요즘은 확신에 찬 한마디가 근거를 대신합니다. 목소리를 조금 높이고 화를 살짝 섞어 말하면, 그 말이 곧 증거처럼 보입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기분 나빠하는 것 역시 근거는 아닙니다. 확신은 근거가 아닙니다. 근거 없이 던져진 말은, 근거 없이 흘려보내도 됩니다.

주장과 논증은 다릅니다. 주장은 내가 무엇을 믿는지 알려 줄 뿐이고, 논증은 왜 그렇게 믿어야 하는지까지 함께 내놓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집으로 치면 주장은 지붕이고 이유는 벽이라고요. 벽 없는 지붕은 집이 아니라, 땅에 내려앉은 널빤지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들려오는 모든 말에 맞받아칠 필요가 없습니다. 증명할 책임은 말을 꺼낸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반박 대신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한마디에 싸움은 대화가 되고, 상대는 자기 말을 처음으로 스스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유를 내놓는다면 그때부터는 함께 따져 볼 것이 생깁니다. 그 이유가 정말 그 결론을 떠받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다만 이 여유는 말솜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굳이 이기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진리이신 분이 이미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거짓 고발 앞에서 잠잠하셨고, 우리가 도무지 갚을 수 없던 죗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셨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이기려는 자리에서 내려오게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이번 한 주, 마음이 불편해지는 말을 만나거든 곧장 되받기 전에 한 번만 물어보십시오. 대화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함께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 칼럼은 콜슨 센터 BreakPoint의 “Arguments vs Assertions in the Internet Age”(2026. 8. 26)가 던진 질문을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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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당연해진 사랑의 뿌리

그리스도인은 위선자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억울하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우리를 그렇게 진단하니까요. 그런데 그 비난 앞에 주저앉기 전에, 한 번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도와야 한다”는 그 당연한 생각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역사가들이 그려 보이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는 우리 상상과 많이 다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밟는 일이 자연스러웠고, 가난은 돌봄이 아니라 경멸의 대상이었으며, 약하게 태어난 아이는 성 밖에 버려졌습니다. 베풂조차 베푸는 자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단단한 세계를 뒤집은 것은 근사한 논쟁이 아니라, 사람의 존엄을 믿고 그대로 살아낸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최근 한 무신론 학자조차 자기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병원과 고아원과 구호 단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겠느냐고, 적어도 이 점에서는 기독교에 감사한다고 말입니다. 재작년 허리케인이 산간 마을들을 무너뜨렸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 가장 늦게까지 남아 낯선 이의 집을 다시 지어 준 이들도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실제로 조사를 해 보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웃보다 훨씬 더 자주 시간을 내고 지갑을 엽니다. 다만 요란하지 않아 잘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우리가 선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랑받았기에 흘려보낸 것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이 세우신 과녁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도울지 말지를 다투지 않고 어떻게 도울지를 다툽니다. 그 물음 자체가 복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입니다. 이번 한 주, 억울한 소리를 듣거든 변명을 찾기보다 조용히 한 사람을 섬겨 봅시다. 오늘의 작은 섬김이 다음 세대의 ‘당연함’이 됩니다.

이 칼럼은 콜슨 센터 BreakPoint의 “The Enduring Myth of Christianity’s Greed”(2026. 8. 19)가 던진 질문을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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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놓아야 할 것은 붙들고, 붙들어야 할 것은 놓습니다

같은 주에 두 이야기를 나란히 읽었습니다. 하나는 리더십을 가장 빨리 잃는 길이 내 것이 아닌 것을 통제하려는 싸움이라는 조언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거센 파도에 반복해 잠기면서도 아이의 팔을 끝내 놓지 않은 열여섯 살 인명구조원의 이야기였습니다. 붙들지 말라는 말과 놓지 말라는 말이 한자리에 있었습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 두 이야기는 서로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우리 손의 문제는 힘이 아니라 방향이었습니다. 우리는 놓아야 할 것을 밤새 쥐고 있고, 붙들어야 할 것은 너무 쉽게 놓습니다. 자녀의 진로, 배우자의 변화, 누군가의 반응, 내일의 결과. 애초에 내 손아귀에 들어온 적 없는 것들을 붙들고 잠을 설칩니다. 그러면서 정작 붙들어야 할 기도 한 제목, 멀어진 한 사람, 오래된 관계 하나는 몇 번 시도하다 조용히 손을 놓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권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여기서 ‘맡기라’는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이 아니라, 짐을 그분께 던져 올리라는 말입니다. 손을 펴라는 명령입니다. 쥐고 있는 한 아무도 대신 들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의 근거는 내 담대함이 아니라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는 한 문장입니다.

손을 펼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파도 한가운데서 끝까지 놓지 않으신 손이 이미 있습니다. 그 손이 나를 붙들고 있기에, 비로소 내 손이 자유로워집니다. 움켜쥐던 것에서는 펴지고, 사랑해야 할 자리에는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오늘 어느 손을 펴고 어느 손을 다시 쥐어야 할지, 주님 앞에 한 번 물어보십시오.

이 칼럼은 Brian Dodd on Leadership의 두 글 “The Fastest Way to Lose Your Leadership”(2026. 8. 6)과 “집념을 보여준 16세 라이프가드”(2026. 8. 3)를 나란히 읽으며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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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내 아이의 첫 연애 상대가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 10대의 72퍼센트가 인공지능 친구와 대화하고, 그중 셋에 하나는 사람에게 차마 못 한 이야기를 그 화면에 털어놓는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가 아니라, 왜 하필 거기로 갔느냐입니다. 인공지능은 지치지 않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말을 끊지 않고, 먼저 자리를 뜨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 편입니다. 아이들이 그 편안함에 머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편안함이 조용히 가르치는 한 문장입니다. “진짜 사람은 수고할 값어치가 없다.” 사람은 실망시키고, 답장이 늦고, 내 말에 반박합니다. 알고리즘과 지내다 보면 관계란 원래 이렇게 쉬워야 한다고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사랑하는 법이 아니라 소비하는 법을 먼저 익힙니다. 어른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미 불편한 사람보다 편리한 화면을 고르는 연습을 오래 해왔습니다.

복음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은 메시지만 보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요약본 한 장이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몸으로 오셨고, 배신당하셨고, 지치셨고,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관계의 수고를 피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잘 정리된 답이 아니라, 한 인격이 끝까지 치른 값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천 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일을 해왔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요일 1:3). 이번 주 자녀에게 좋은 답을 주려 애쓰기 전에, 어색한 침묵까지 함께 견뎌주는 저녁 식탁 십오 분을 먼저 내어주십시오. 화면이 끝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수고이기 때문입니다.

이 칼럼은 Carey Nieuwhof의 “당신 자녀의 첫 연애 상대는 AI일 수 있다”(2026. 8. 3)에 실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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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AI는 3초 만에 답하는데, 하나님은 왜 잠잠하실까

요즘은 궁금한 것이 생기면 3초 만에 답을 얻습니다. 검색창에 묻든 인공지능에게 묻든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편리합니다. 그런데 그 편리함이 우리 마음에 조용히 남기는 것이 있습니다. 답이 늦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는 감각입니다. 그래서 기도한 지 사흘이 지나도 하늘이 조용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닐까, 내 믿음이 모자란 것은 아닐까. 기다림을 견디는 근육이 우리 세대에서 가장 먼저 물러졌습니다.

성경은 그 조용함을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다윗은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두 번 말합니다. 응답이 늦어진 것이 아니라, 그 기다림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예레미야도 같은 자리에서 말합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인공지능은 즉시 답하지만 사람을 빚어내지는 못합니다. 정보는 3초면 옮겨지지만, 사람은 그렇게 자라지 않습니다. 뿌리가 얼마나 내렸는지 매일 뽑아 확인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신앙은 내려받는 것이 아니라 오래 걸려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잠잠하신 시간은 답을 미루시는 시간이 아니라, 답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 안에 만드시는 시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침묵을 통과하신 분이 계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으셨을 때, 하늘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을 그분이 우리 대신 견디셨기에, 이제 우리의 기다림은 버림받음이 아닙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바로 그 자리에, 이미 응답이신 분이 함께 앉아 계십니다. 오늘 하늘이 조용하다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중입니다.

이 칼럼은 Carey Nieuwhof의 “AI는 늘 답하지만 하나님은 때로 침묵하신다”(2026. 7. 31)가 던진 질문을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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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잊지 않겠다는 약속

50년 전 이번 주, 감옥에서 들은 냉소 한마디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교도소 선교를 낳았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수감됐던 척 콜슨이 출소를 앞두고 있을 때, 덩치 큰 동료 재소자가 그를 붙들고 쏘아붙였습니다. “곧 나가겠지. 우리한테는 뭘 해줄 건데?” 콜슨이 “이곳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고는 나가서 잊어버려.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한마디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 한마디를 쓰셨습니다. 1976년 8월, 콜슨은 프리즌 펠로우십을 세웠고 이후 50년 동안 담장 안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감옥에서 성경공부가 열렸고, 출소한 이들이 다시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교회들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성탄절마다 수감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이에게 선물이 전해지는 ‘엔젤트리’는, 끊어진 가족의 끈을 다시 잇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콜슨은 대통령을 자문했고 시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은 따로 있다고 늘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새사람이 된 죄수들, 곧 “은혜의 살아있는 기념비”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일을 마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그분은 우리 삶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갇힌 자를 함께 갇힌 것 같이 하라”(히 13:3). 우리 곁에도 저마다의 감옥에 갇힌 이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거창한 사역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이번 한 주, 마음에 떠오르는 그 한 사람에게 먼저 연락해 보십시오. “잊지 않았습니다”라는 짧은 한마디를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지,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이 칼럼은 콜슨 센터(Colson Center) BreakPoint의 “Happy 50th, Prison Fellowship”(2026. 8. 4)의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 교회의 언어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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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성도의 발걸음을 가볍게

세상은 마찰로 가득합니다. 인터넷은 쿠키와 팝업과 인증 단계로 막혀 있고, 사람들은 모든 곳에서 막힙니다. 그 속에서 교회는 어떨까요? 새 신자가 예배 드리러 오려면? 소그룹에 참여하려면? 교회와 연락하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할까요?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 오라"고 하셨습니다(마 11:28). 그런데 우리가 만든 등록 양식이, 공지 채널이, 참여 절차가, 혹시 그 짐을 더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가장 신실한 사랑은 때론 매우 단순합니다. 한 걸음을 더 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번 주, 당신의 교회 일상 하나를 골라보세요. 새로운 이가 참여하는 경로를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그중 한 단계를 없애보세요. 이름 양식을 줄이거나, 연락을 더 쉽게 하거나, 소그룹 참여를 간단하게. 그것이 진리와 은혜의 교회가 보여주는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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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당신의 유산은 누구인가

위대한 목사 유진 피터슨은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유산은 내가 쓴 책도, 내가 한 설교도 아니다. 내 유산은 내게 맡겨진 사람들이다." 그는 명성의 길과 단순한 길 앞에서, 후자를 택했습니다. 플랫폼을 거절하고, 소수의 영혼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자도 모르게 야망의 유혹에 포박됩니다. 더 큰 교회, 더 유명한 설교, 더 많은 추종자.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손에 쥐고도 정말 남는 게 무엇일까요? 당신 곁에 앉아 있는 저 사람, 당신 말을 듣고 변한 그 사람, 당신이 기도한 제자들입니다. 유진은 아들에게 묻는 말에 "너다. 넌 내 유산이다"라고 답했습니다.

디모데에게 전하고 디모데가 다른 충성된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또 전하는 것(딤후 2:2).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유산입니다. 이번 주, 당신의 영혼 건너편에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세요. 당신은 거대한 무언가를 남기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 사람 안에, 영원히 남을 신앙의 씨를 심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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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친절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 교회는 따뜻하다고 자부합니다. 주일마다 현관에서 인사하고, 낯선 얼굴에 웃음 짓고, 한 잔의 커피를 건넵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그 친절함이, 정말로 누군가를 교회 가족으로 만들어냈나요?

새 방문자들이 원하는 건 따뜻함이 아닙니다. 따뜻함은 이미 기본입니다. 그들이 진짜 찾는 건 관계입니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 "다음 주에도 다시 와도 될까?" "이 사람들은 진짜 나를 알고 싶어 할까?" 이런 질문들입니다. 친절은 문을 여는 것이고, 소속은 그 안에 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그들을 환대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요 17:20-23). 미소와 악수를 넘어, 우리가 세워야 할 것은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번 주, 낯선 얼굴 하나를 향해 물어보세요. "어느 모임에 함께하고 싶으신가요?" 그것이 친절을 소속으로 만드는 첫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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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정말 자유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해라", "네가 느끼는 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다"라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기 마음대로 살면 살수록 사람들은 더 공허해지고, 중독과 불안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히곤 합니다.

최근 콜슨 센터(Colson Center)는 현대인이 오해하고 있는 '자유'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전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내 욕망을 방해받지 않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이 설계하신 목적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롭고, 기차가 선로 위를 달릴 때 가장 자유롭듯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 안에 머물 때 가장 안전하고 자유롭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 부인'에서 시작됩니다. 내 욕망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유혹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질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지금 나는 내 욕망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를 따르고 있는가?" 주님의 법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시는 은혜로운 한 주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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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사역

보이지 않는 손길, 예배 경험 센터 이야기

지난 주일 청지기 모임에서 올해 사역 조직이 새롭게 개편되었다는 소식을 나누었습니다. 짧은 시간이라 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 있어, 앞으로 세 주에 걸쳐 각 센터별로 조금 더 깊이 나누려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예배 경험 센터' 이야기입니다.

매주일 예배당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환하게 맞아주는 인사, 정갈하게 놓인 의자, 그리고 첫 찬양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 모든 것 뒤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린다'고 말할 때, 그 예배는 사실 누군가의 기도와 땀 속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올해 김등수 코디네이터를 중심으로, 이진실 리더가 이끄는 찬양·미디어팀이 매주 악보를 고르고 영상을 점검하며, 우리 입술의 고백이 한목소리가 되도록 함께 연습합니다. 박정심 리더가 이끄는 환대·환경팀은 예배당 문을 열고, 꽃을 놓고, 성찬상을 차리며, 처음 오신 분이 '다시 오고 싶다'고 느끼도록 작은 것 하나까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동안 찬양과 환경 사역은 각각 따로 움직여왔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다릅니다. 찬양의 흐름과 공간의 분위기가 하나의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두 팀이 함께 머리를 맞대기로 했습니다. 예배 시작 전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그 순간부터, 마지막 축도 후 서로의 안부를 묻는 그 시간까지, 모든 순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여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분들의 섬김 위에 기도를 얹어주십시오. 찬양이 울릴 때 함께 마음을 모아주시고, 예배 후 자리를 정리하는 작은 손길에도 동참해 주십시오. 예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드리는 사람'이 될 때, 이 작은 예배당에 하나님의 임재는 더욱 깊고 풍성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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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안개 낀 세상, 우리 집은 '진리의 등대'입니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세상이 참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와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지는 이 시대 속에서, 성경적 세계관으로 시대의 흐름을 분별하도록 돕는 기독교 연구 기관인 '콜슨 센터(Colson Center)'는 최근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문화적 안개가 짙게 낀 상태'로 비유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만큼 세상의 기준이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이 안개는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공동체는 단순히 세상을 피하는 도피처가 아니라, '진리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등대의 역할은 안개를 단번에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안개 속에서도 배들이 길을 잃고 암초에 부딪히지 않도록, 변하지 않는 빛을 비추어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

진리의 빛을 비추는 일은 거창한 구호에 있지 않습니다. 식탁에 둘러앉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하고, 일터에서 정직을 선택하며, 세상의 유혹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바로 가장 강력한 빛입니다. 세상이 "진리는 각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속삭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기준"임을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기도로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길 권합니다. 세상의 거센 파도와 짙은 안개 속에서도 우리 자녀들이, 그리고 방황하는 이웃들이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은 점점 어두워져도, 주님의 진리를 품은 여러분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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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흔들리는 세상 속, 변하지 않는 진리의 닻을 내리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른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입니다. 문화와 미디어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며, 각자의 감정과 경험이 곧 진리"라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객관적 사실보다는 개인의 주관적 신념이 우대받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마저 상대적인 개념으로 치부되는 거센 세속화의 파도 한가운데 우리가 서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은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진리는 우리가 발명하거나 느끼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발견'되어야 할 영원한 실체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적 위안을 주는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온 우주와 생명의 본질을 설명하는 "모든 현실에 대한 진리(Truth about all reality)"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거친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이번 한 주간 마음에 새겨야 할 세 가지 영적 지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감정을 넘어선 진리의 기준 확립: 내 안의 요동치는 감정이나 세상의 다수결이 삶의 나침반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유일한 도덕적, 영적 기준임을 매일 고백해야 합니다.
  2. 세계관의 분별력 훈련: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 미디어, 문화 속에는 세속적인 가치관이 교묘하게 숨어 있습니다. 성경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거짓된 메시지를 분별해 내는 영적 시력을 길러야 합니다.
  3. 사랑 안에서 진리 말하기: 진리를 수호한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긍휼을 품고 진리를 담대히 선포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의 반석 위에 영혼의 닻을 깊이 내리십시오. 우리의 삶 전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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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거실로 찾아온 전쟁, 가정을 기도로 파수하십시오

오늘날 사탄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은밀한 전략은 바로 '가정의 해체'입니다. 과거에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영적 전쟁의 최전선이 지혜로운 분별력을 요구하는 외부의 영역에 있었다면, 이제는 미디어와 스마트폰, OTT 플랫폼을 타고 우리의 안방과 거실 깊숙한 곳까지 무차별적으로 침투해 오고 있습니다.

콜슨 센터의 세계관 통찰에 따르면, 현대 문화는 끊임없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너희 부모의 신앙은 낡은 것이며, 성경의 기준은 너희의 자유를 억압하는 틀에 불과하다"고 속삭입니다. 거룩한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고,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화하려는 세속화의 파도가 매일 밤 우리의 가정 안에서 소리 없이 침윤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우리의 가정과 다음 세대를 믿음으로 파수하기 위해, 이번 한 주간 세 가지 결단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시작되는 출발점이자, 세상의 거친 파도를 막아내는 반석입니다. 이번 한 주간, 거실로 찾아온 영적 전쟁을 외면하지 마시고, 기도의 방패와 말씀의 검을 들어 여러분의 가정을 신실하게 지켜내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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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정직한 고백이 공동체를 살립니다

우리는 흔히 갈등 없고 분위기 좋은 소그룹을 이상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불편함 없는 모임'을 유지하려다 보면 삶의 진정한 변화는 더디게 나타납니다. 그 모임에 정직한 '고백'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백이 없는 모임은 자칫 체면과 비교의 공간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연약함을 고백하는 순간, 소그룹은 복음 앞에서 평등해지며 서로를 판단하지 않는 진정한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첫째, 고백은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모두가 '괜찮은 신앙인'이라는 가면을 내려놓을 때 끈끈한 연대가 시작됩니다. 특히 리더가 먼저 연약함을 나누며 은혜를 구할 때, 닫혀 있던 마음의 문들이 열립니다.

둘째, 고백은 기도의 깊이를 바꿉니다. "잘 지내게 해달라"는 막연한 나눔이 아니라, 일상의 상처와 열등감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 기도는 강력해집니다. 고백 위에 드려지는 기도는 모임의 가장 깊은 영적 호흡이 됩니다.

셋째, 고백은 삶을 변화시키는 영적 훈련입니다. 성경은 자백을 영적 성장의 핵심으로 제시합니다(요일 1:9). 고백은 단순한 감정 공유를 넘어 회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어집니다. 모임의 목적은 지식 축적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공동체는 서로의 허물을 품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고백이 있는 모임은 때론 불편할 수 있으나, 그곳에 은혜가 흐르고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겉모습만 화려한 모임을 넘어, 정직한 고백을 통해 진정으로 건강하고 성숙하게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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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소식

2026년 올랜도 총회를 은혜 가운데 마치고 돌아와서

지난 주간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열린 미 남침례회(SBC) 정기총회와 한인총회 일정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왔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기도로 동역해 주시고 교회를 든든히 지켜주신 성도님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올해 총회는 교단 내에 의미 있는 지각변동과 중요한 결단들이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교단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두셔야 할 핵심 이슈와 결과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적 진리 수호와 보수적 신앙의 재확인입니다. 이번 총회에서 가장 큰 화두는 '여성 목사 안수 및 주일 예배 설교를 금지하는 헌법 개정안(Truth and Unity Amendment)'이었습니다. 이 안건은 74%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었습니다. 이는 세속적인 시대 흐름에 타협하지 않고, 성경의 권위에 온전히 순종하려는 교단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지각변동입니다. 또한, 교단의 보수적 쇄신과 갱신을 강조해 온 윌리 라이스(Willy Rice) 목사님이 새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진리 수호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둘째, 예배의 본질과 생명의 가치 강조입니다. 조력 자살(안락사) 반대, 반유대주의 규탄, 장애인 사역 확대, 정치적 폭력 배격 등 8개의 중요한 결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디지털 기술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일 뿐, 성도의 물리적 모임과 대면 예배를 결코 대체할 수 없다"는 결의안입니다. 온라인 편의주의가 만연한 시대에도 모이는 지역 교회의 본질적인 가치를 굳게 다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인총회의 연합과 다짐입니다. 함께 열린 한인총회에서는 다가오는 미 건국 250주년을 맞아 우리에게 허락된 신앙의 자유에 깊이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아가 한인 교회들이 굳건히 연합하여 다음 세대에게 변질되지 않은 복음을 전수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대위임령 성취에 헌신할 것을 뜨겁게 결의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도 우리 교단이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서려는 모습을 보며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도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예배의 기쁨을 회복하며 복음의 본질에 더욱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진리 안에서 든든히 세워져 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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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하나님 앞에서 변명이라는 짐을 내려놓으며

우리는 때때로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기보다 그것을 외면하고 포장하는 데 익숙해지곤 합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등장하는 사울 왕 역시, 불순종의 죄를 회개하기보다 세 가지 방식으로 진실을 억누르며 자신을 변명했습니다. 오늘 그의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의 중심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태도입니다. 사무엘의 책망에 사울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이라며 백성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우리 역시 연약함을 인정하기보다 환경이나 타인을 탓하며 마음의 짐을 덜어내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넘길 수 없습니다.

둘째, 선한 의도로 불순종을 덮으려는 태도입니다. 사울은 불순종의 결과물인 가축을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남겼다"고 항변합니다. 봉사나 헌신 같은 명분을 내세워 내면의 불순종을 희석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명분도 말씀에 대한 순종을 상쇄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외적인 열심보다 온전히 순종하는 중심을 기뻐하십니다.

셋째, 자신의 죄를 축소하고 합리화하는 태도입니다. 사울은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 순종했으니 작은 불순종쯤은 괜찮다고 여긴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타인과 비교하며 내 죄는 가볍다고 스스로 안심하지만, 하나님은 타협 없는 온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의 엄중한 선포를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화려한 변명이 아니라 진실한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직분과 헌신으로 자신을 포장하던 연약함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정직한 회개와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복된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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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삶의 나눔을 넘어, 말씀이 이끄는 소그룹(셀)으로

우리 교회의 소그룹 모임이 사랑과 은혜 가운데 진행되고 있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모임 안에서 직장, 자녀, 인간관계 등 삶의 애환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친교와 공감의 시간은 참으로 귀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임이 단순한 친목과 위로에만 머문다면, 더 깊은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기는 어렵습니다. 진정으로 생명력 있는 영적 공동체는 삶의 나눔을 넘어 '말씀 앞에 함께 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소그룹을 말씀 중심의 은혜로운 자리로 세울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모든 소그룹이 나의 연약한 삶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복된 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모일 때마다 진리가 살아 숨 쉬는 풍성한 공동체를 함께 세워갑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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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인도자는 곁에서 함께 걷는 동행자입니다

셀 소그룹 인도자는 완성된 스승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길을 먼저 걷고 그 길로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오래 인도했다고 해서 다 배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복음 앞에 서야 하고, 훈련생보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울은 자기 성찰을 멈추며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졌지만, 다윗은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며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인도자는 해마다 자신을 훈련생의 자리로 내려놓고, 교만과 자기의, 익숙함과 형식주의를 살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인도자는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곁에서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엠마오 길에서 예수님께서 낙심한 제자들의 속도에 맞추어 걸으셨듯이, 인도자도 함께 하는 셀원의 연약함과 느린 변화까지 품고 기다려야 합니다. 셀 소그룹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배우고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라"는 지시보다 "나도 이렇게 살기 위해 씨름하고 있다"는 고백이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삶으로 보여 주는 복음은 어떤 설명보다 강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무엇보다 셀 소그룹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 영혼을 품는 사역입니다. 셀원들을 수료자나 결과물로 보지 않고, 함께 울고 웃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베드로의 실패를 아시면서도 그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처럼, 인도자는 정죄보다 중보를, 조급함보다 사랑의 인내를 선택해야 합니다. 참된 인도자는 화려한 리더가 아니라, 날마다 복음 앞에 낮아지고 셀원들과 함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동행자입니다. 그런 인도자를 통해 소그룹은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복음으로 새로워지는 은혜의 현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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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파편화된 세상, 통전적 진리로 잇다

최근 콜슨 센터(Colson Center)가 전한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아픔인 '파편화(Fragmentation)'를 짚어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종교와 과학, 주일과 평일,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철저히 분리합니다. 신앙은 그저 마음의 위안을 주는 개인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공적인 삶의 자리는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가득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온 우주와 우리의 모든 일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교회 안에서만 주님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모든 현실의 주님이십니다. 이 파편화된 세상 속에서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진리로 연결하기 위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영적 가치들을 나눕니다.

첫째, 신앙과 일상의 일치입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파편화된 문화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직장, 그리고 매일 마주하는 행정과 실무의 자리까지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거룩한 처소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정직과 성실로 임할 때, 일상은 거룩한 예배가 됩니다.

둘째, 진리를 통전적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뉴스를 볼 때도, 책을 읽을 때도, 다음 세대를 교육할 때도 성경의 렌즈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과 성경의 진리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는 하나의 큰 그림 속에서 세상을 분별하는 영적 시력을 길러야 합니다.

셋째,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는 사명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편 가르고 분열시키지만, 복음은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소그룹 안에서 나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서로의 허물을 말씀으로 품어줄 때, 세상이 모르는 참된 공동체의 일치와 회복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을 조각내어 세상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이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삶으로 증명해 내기를 바랍니다. 변하지 않는 통전적 진리 위에 굳건히 서서, 파편화된 세상을 치유하고 변혁시키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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